[펌]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76> 김연아의 마음 다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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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76> 김연아의 마음 다스리기 [중앙일보]

2010.03.04 00:45 입력 / 2010.03.04 11:29 수정



“왜 하필 저 아이가 나랑 같은 시대에 태어났을까?”



누구의 말일까요. 동계 올림픽에서 분패한 아사다 마오의 한탄일까요? 아닙니다. 6년 전 아사다 마오를 처음 만난 김연아 선수가 던졌던 말입니다. 200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이 열릴 때였죠. 김연아는 공식연습 때 너무나 가볍게 점프를 성공시키는, 트리플 악셀도 실패하지 않는 마오를 보며 그렇게 푸념했죠. 그리고 6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김연아는 더 빠르고, 더 유연한 나무로 훌쩍 성장했죠. 이번 올림픽에선 그런 성장의 차원을 단적으로 엿보게 하는 ‘짤막한 풍경 둘’이 있었습니다.

# 풍경1 : 여자 싱글 피겨스케이팅 쇼트 프로그램에서 김연아는 세계신기록을 세웠죠. 경기 직후 인터뷰를 하더군요. “첫 시작이 좋으니 프리 프로그램에선 부담을 덜지 않겠나?”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예사롭지 않더군요. “부담을 덜 수도 있고,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마음에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서 새로운 시합을 시작한다는 마음을 갖겠다.” ‘현문우답’은 그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세계신기록 경신이 부담스럽지 않나?”를 묻는 우회적인 물음에 대한 답은 수백 가지가 나올 수 있죠. 그런데 김연아 선수가 꺼내서 답한 카드는 ‘정답’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풍경 2 : 쇼트 프로그램에서 뒤진 아사다 마오는 프리 프로그램에서 반격을 꾀했습니다. 마오는 첫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켰죠. 그러나 스케이트를 타는 내내 ‘첫 점프의 성공’을 놓지 못했습니다. 경기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마오는 “(첫 점프의 성공) 그 다음부터 긴장하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김연아 선수의 코치인 브라이언 오서는 이렇게 말했죠. “처음 만났을 때부터 김연아는 바위 속의 다이아몬드였다. 나는 바위를 부수고 다이아몬드를 찾아냈을 뿐이다.” 다이아몬드가 뭔가요? 끝없는 가능성이자 무한한 에너지죠. 피겨 선수들은 피나는 훈련을 통해 그 다이아몬드를 갈고 닦죠. 그리고 대회에 출전하는 겁니다. 김연아도, 아사다 마오도 그렇게 갈고 닦은 ‘내 안의 다이아몬드’를 올림픽에서 원 없이 끄집어내고자 기대를 하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를 통째로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죠.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내 안의 다이아몬드’를 끄집어내는 통로가 뚫려 있어야죠. 쇼트 프로그램에서 세계신기록을 경신한 김연아는 얼마나 뿌듯했을까요. 4년간 기다린 금메달의 꿈에 얼마나 설렜을까요. 그날 밤에 잠은 제대로 잤을까요.

그런데 그 ‘뿌듯함’과 ‘설렘’이야말로 다이아몬드의 통로를 막는 적입니다. 왜냐고요? 마음은 접착제이기 때문이죠. 기쁨이 크고, 기대가 크고, 슬픔이 크고, 고통이 클수록 마음은 순식간에 달려가 ‘촤~악!’하고 거기에 달라붙죠. 그냥 접착제가 아니라 초강력 접착제죠. 좀체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달라붙은 마음은 순식간에 장애물이 되고 말죠. 내 안의 다이아몬드를 끄집어내는 에너지의 통로를 막으니까요.

김연아 선수는 그걸 간파하고 있더군요. “다시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가 새로운 시합을 하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한마디에 이미 해법이 들어있었죠. 세상을 삼킬듯한 영예라도 포맷을 시켜야만 새로운 에너지가 샘솟는 법이죠. 반면 아사다 마오는 달랐습니다. 첫 점프를 트리플 악셀로 성공시키고도 거기에 묶이고 말더군요. ‘첫 점프의 성공’에 그의 마음이 ‘촤~악!’하고 달라붙은 거죠. 그리고 떨어지지 않았겠죠. ‘이 성공을 끝까지 이어가야 할 텐데….’ 그래서 마오의 긴장이 시작된 겁니다.

결국 김연아는 기술점수, 예술점수에서만 마오를 앞선 게 아니죠. 마음 굴리는 법, 내 안의 다이아몬드를 끄집어내는 법에서도 마오를 앞섰던 겁니다. 얼음판은 삶의 축소판이죠. 그래서 얼음판의 이치가 세상의 이치, 우주의 이치와 통합니다. 그럼 다음 세계선수권대회의 우승자는 누가 될까요. 금메달의 영예도 ‘툭!’ 내려놓고 달리는 이, 은메달의 분함도 ‘툭!’ 내려놓고 달리는 이가 되지 않을까요. 그때 또 누군가 말하겠죠. “왜 하필 저 아이가 나랑 같은 시대에 태어났을까?”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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